최근 본 영화가 두 편 있는데 구스 반 산트의 '파라노이드 파크'와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이다. 하나는 프랑스 영화 하나는 벨기에 영환데 둘다 소년이 주인공이다. 두 영화는 소년의 방황과 소년을 둘러싼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고 차분한 이미지로 보여준다는 공통점이 있고, 한국에 살고 있는 성인(..일까?) 여성의 시점에서 도대체 피부로 와닿는 공감이 없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방황과 혼란을 겪고 있는 사춘기 특유의 우울하고 아슬아슬한 감수성은 두 영화에서 '스케이트 보드'와 '자전거'라는 이미지로 표현된다. 끔찍하리만큼 아름답거나 한없이 목가적인 이미지들. 이것은 감히 로맨틱하다. 내가 자란 한국의 청소년은 그렇게 로맨틱하지 못하다. 그들이 방황한다면 그것은 더럽고 치졸하고 잔혹하며 애매하다. 한국 사회에서 폭력은 학교 구성원 누구에게나 내면화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은 덜 자랐고, 타의에 의해 한정된 공간에 내몰렸으며, 나이브한 잣대에 의해 폭력적으로 평가당한다. '이기는 경쟁'에 대한 나이브하고 폭력적인 강요는 정작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디테일한 삶의 방식을 일러주지 않는다. 거대한 폭력을 이미 감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자생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몹시, 잔혹하고 폭력적인 방식이다.
이것이 로맨틱한가? 끔찍하다. 물론 파라노이드 파크에서 두 동강난 시체랄지, 자전거 탄 소년에서 비정한 아버지는 소년이 감당해야할 '끔찍한' 몫을 어느정도 설정해 놓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소년을 '로맨틱한 방황'에 몰아넣는 '끔찍한 계기'일 뿐이다. 현실의 소년들은 또 소녀들은'폭력적 계기'에 의해 '끔찍한 방황'에 내몰린다.
그렇다고 내가 한국 영화 '파수꾼'에 공감하는 것은 또 아니다. 한국의 소년이 아니라 소녀였기에 그런 걸수도 있다. 그러나 '파수꾼' 또한 파라노이드 파크나 자전거 탄 소년이 보여준 '사춘기의 낭만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번듯한 외모의 남고생들은 이젠 잘 찾아보기도 힘든 인적 드문 철도길을 따라 걸으며 투닥거린다. 교복, 노을, 철도, 실루엣, 우정. 한국화된 '스케이트 보드' 혹은 '자전거'일 뿐이다. 우리는 왜 파수꾼에 열광했는가? 간신히 잊어버린 끔찍한 순간들을 아슴푸레한 로맨틱으로 기억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
내가 철저히 공감했던 것은 '시'에서 손자(이름이 뭐지?)와 그 친구들이 저지른 범죄의 모습이다. 여드름 난, 어색하게 수염이 돋은 손자의 범죄는 잔혹하고 더럽다. 그리고 그 손자가 보여주는 심드렁함은 끔찍하다. 또래의 소녀를 집단 성폭행해서 자살에까지 이르게 한 이들의 범죄는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진짜 '방황'이다. 그것은 부서지는 햇살로 가릴 수 없는 구역질 나는 실재다. 실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버둥거리고 있는지.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소년의 방황이 로맨틱하다면, 그것은 회상이거나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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